만화의 시간을 보존하다_구술채록과 아카이빙의 동행

2025-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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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은 개인의 기억을 바탕으로 구술자가 자신의 삶과 경험을 구술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기록하여 역사적·사회적 자료로 활용하는 질적 연구 방법이다. 문자로 남기지 못한 기억, 특히 기존 문서 자료나 통계로는 포착할 수 없는 개인의 경험, 사회적 맥락 속의 감정과 해석을 반영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 된다. 구술 기록은 일반기록물과 달리 다양한 매체로 구성되며, 구술자와 면담자 간의 심층면담을 담은 영상·녹음 데이터, 촬영 사진, 구술자가 보유한 관련 자료, 면담 개요·녹취문·면담일지 등의 부속서류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는 이유는, 단일 서술로는 담기 어려운 정서와 분위기, 신체 언어, 주변 환경 등 다층적 정보까지 포착하여 기록의 생동감과 해석의 깊이를 높이기 위함이다. 즉, 구술채록은 과거의 경험을 현재적 시점에서 재구성하고, 그 의미를 다각도로 해석함으로써 공적 기록의 새로운 층위를 형성하는 작업이다.


구술채록은 다음과 같은 면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첫째, 기록되지 않은 역사와 목소리를 보존한다. 이는 특히 주변화된 개인들, 예를 들어 원로 만화가나 비주류 창작자처럼 기존 기록에서 배제되기 쉬운 이들의 경험을 담는 데 유효하다.

둘째, 문서 중심 기록의 공백을 메운다. 특히 한국만화의 경우 산업적 성장은 있었지만 역사적 기록이나 아카이브 축적이 매우 미흡한 실정이다. 따라서 원로 작가들의 생애사, 창작과정, 당시의 사회·산업적 환경에 대한 증언은 유일한 기록이자 사료가 될 수 있다.

셋째, 새로운 해석과 역사 쓰기의 기반이 된다. 구술채록은 기존 문서 기록에서 누락된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역사를 풍성하게 하며, 연구자뿐 아니라 일반인도 참여할 수 있는 '민주적인 기록'이라는 의의도 갖는다.


구술채록은 준비하고 기획하는 과정도 만만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목적에 부합되는 실행 과정을 위해서는 철저하고 면밀한 단계를 거쳐야 하고, 언제까지나 미루고 기다릴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시기 또한 굉장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지더라도 때를 놓치면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1. 대상자 선정: 주제와 관련된 인물, 예를 들어 한국만화 1세대 작가, 웹툰 산업 초기 기획자, 편집자 등을 선정한다. 이들은 사회적·문화적으로 특정 시대를 증언할 수 있는 핵심 인물들이다. 이때 단단한 지지층을 형성하거나 시대를 관통하는 인지도를 지닌 인물의 선정도 중요하지만, 구술채록이 소수 엘리트 중심의 기록으로만 흐르지 않도록, 당대를 함께 살아낸 다양한 계층과 주변부 인물들의 기록이 병행되는 것이 더욱 의미 있고 필수적이다.

  2. 예비조사 및 라포형성: 면담 전 사전조사를 통해 구술자의 생애, 작품, 활동 등을 조사하고 신뢰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면담을 담당하는 연구자는 구술채록 대상자에 대한 충분한 사전정보와 이해도를 갖추고 있어야 하며, 이는 면담의 질과 구술 내용의 깊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와 같이 예비 면담, 작품 감상, 주변 인물과의 접촉 등을 통해 신뢰의 기반을 닦는다.

  3. 질문지 구성 및 면담 설계: 회차별로 구술내용을 설계하고 핵심 질문을 구성한다. 가벼운 주제에서 점차 심화된 내용으로 나아가는 것이 원칙이며, 민감한 주제는 후반부로 미루는 전략이 효과적이다.

  4. 실제 면담 및 기록: 최소 3~5회에 걸쳐 구술을 진행하며, 영상·음성 녹취와 사진 촬영을 병행한다. 동시에 면담일지, 면담요약, 전사본 작성 등도 체계적으로 수행한다.

  5. 자료정리와 해제문 작성: 전사된 텍스트는 구술자의 언어적 뉘앙스를 최대한 살리되, 연구와 활용을 위한 편집이 필요하다. 구술자의 검토를 거쳐 최종본을 확정한다.

  6. 아카이브화와 활용: 결과물은 디지털 아카이브화 되어 공개 가능한 부분은 학계, 교육, 대중에 제공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한 저작권 협의도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만화에 있어 구술채록이 지니는 의미를 살펴보고, 그 활동과 연구가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한국만화는 풍부한 문화적 자산임에도 불구하고, 관련 기록과 연구는 제한적이었다. 특히, 원로 작가들의 증언은 시대적 흐름과 산업 내부의 현실을 파악하는 유일한 경로일 수 있으며, 그들의 사라지는 기억을 기록하는 것은 단순한 인터뷰를 넘어 역사적 책임이다. 만화에서 구술채록은 기존의 한정된 문서자료를 넘어 문서로 포착할 수 없는 생생한 경험과 맥락을 보완하고, 문장으로 기록된 내용의 뉘앙스를 통한 추측이 아닌 다각적이고 면밀한 사실 확인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또한 구술채록을 통해 기존의 역사에 대한 기록과 정보를 다층적으로 분석하고 해석의 폭을 넓힐 수 있으며, 이는 만화사의 체계적 정립뿐 아니라 창작자 중심의 문화사 기술이라는 측면에서도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작업이다. 만일 한국 만화사에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사람들의 문헌만을 가지고 역사가 연구된다면, 과거의 불완전성은 현재에 이르러서도 불완전성을 유지하도록 할 가능성이 크다. 구술사는 다양한 사람들의 과거의 경험을 인터뷰를 통해서 기록하고, 그 기록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의 긍정적 순환과 지속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구술사는 현재의 불완전성이 미래의 불완전성이 되지 않도록 과거의 목소리를 현재에 되살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다리를 잇는 작업인 것이다.

구술채록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닌, 산업 현장의 실제 맥락을 보존하고 활용하는 데 있어 강력한 도구로 작용한다. 특히 만화 및 웹툰 산업의 경우, 창작자 개인의 경험이 산업 구조 및 문화 전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들의 목소리를 직접 기록하고 정리하는 일은 실천적이고도 전략적인 행위다.

첫째, 창작자들의 구술을 활용한 교육 콘텐츠 개발이 가능하다. 구술 기록은 단순한 생애 서사에 머무르지 않고, 창작 철학, 기술, 당시의 업계 문화 등을 담고 있어, 후속 세대의 작가 교육에 효과적인 학습 자료가 될 수 있다. 

둘째, 창작 현장의 구체적 기록을 통해 산업정책 수립에 활용할 수 있다. 과거 산업 환경, 창작자의 애로사항, 플랫폼과의 관계, 편집 시스템의 변화 등은 구술을 통해 가장 사실적으로 드러나며, 이는 향후 창작자 권익 보호나 산업 제도 개선을 위한 정책 수립의 근거자료로 기능할 수 있다.

셋째, OSMU(One Source Multi Use) 자원으로 활용 가능하다. 구술 내용을 바탕으로 다큐멘터리, 전시, 웹툰, 애니메이션, 드라마 등 다양한 2차 콘텐츠 제작이 가능하며, 이는 구술자료의 활용 폭을 넓히고 콘텐츠 산업의 다양성과 깊이를 더하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구술채록은 기록에 머무르지 않고, 교육, 정책, 콘텐츠 산업 전반에서 실질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융합적 자원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이러한 실용성과 확장 가능성은 구술채록을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닌, 산업 기반 구축의 핵심 전략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제 구술채록은 만화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구술채록을 웹툰 분야에도 적용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웹툰은 디지털 기반의 콘텐츠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그만큼 변동이 많고 현재의 경험이 쉽게 사라질 위험이 있다. 초기 웹툰 작가, PD, 플랫폼 기획자 등의 경험은 향후 웹툰사 정립을 위한 핵심 사료이며, 구술채록 없이는 이 경험들이 쉽게 소멸될 수 있다. 또한 AI 창작, 웹툰 수출 등 급변하는 산업 환경 속에서 변화의 맥락을 기록하는 데 구술채록이 필수적이다. 이는 오랫동안 만화사의 흐름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자료의 수집과 기록, 보존의 과제를 반면교사 삼아야 함을 시사한다. 이제 막 기틀과 근간을 마련해 가는 웹툰 분야에서는 이러한 기록의 누락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더욱 선제적이고 체계적인 구술채록이 병행되어야 하며, 이는 곧 미래의 웹툰사를 위한 가장 중요한 기초작업이 될 것이다.


나아가 구술채록이 긍정적으로 사용되기 위한 방향성에 대해 살펴보자. 구술채록이 진정한 공공 기록으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수집과 보존을 넘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참여하고 이를 공유하며, 실질적인 활용이 가능한 체계를 갖추는 것이 핵심이다. 특히 창작자 개인의 삶과 작업 과정이 중심이 되는 만화 및 웹툰 산업에서는 기록의 주체와 이용자가 분리되지 않도록, 상호 협력과 참여를 전제로 한 아카이빙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방향이 필요하다.

  • 참여형 기록문화 정착: 창작자, 연구자, 독자 등 다양한 주체가 기록의 생산, 보존, 활용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시스템을 구축한다. 공공기관은 협업 모델을 통해 민간과 연계된 구술기록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 디지털 기반의 공개와 공유: 구술 결과물을 디지털 아카이브화하여 온라인 환경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검색·열람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정보 접근성을 보장한다. 이를 위해 저작권, 정보공개 범위, 개인정보 보호 등의 제도적 기반이 선행되어야 한다.

  • 표준화된 매뉴얼 마련: 구술채록의 전문성과 윤리성을 확보하기 위해 조사 기획, 면담, 기록, 정리, 보존, 활용의 전 과정을 아우르는 매뉴얼을 개발하고, 이를 관련 기관 및 연구자에게 보급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방향성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구술기록의 사회적 인식 제고와 함께, 정책적·재정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전문 아카이브 구축, 교차 검증을 통한 사료의 신뢰도 확보, 정기적인 큐레이션 콘텐츠 개발 등을 통해 구술채록의 활용 가치를 지속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반드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뛰따라야 한다.

  1. 국가 및 지자체 주도의 지원사업 확대: 한국만화영상진흥원, 한국콘텐츠진흥원, 지방문화재단 등 적합한 기관을 연계하여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연례 사업으로 구술채록을 수행.

  2. 구술아카이브 전문 인력 양성: 구술 면담, 자료관리, 콘텐츠화까지 담당할 전문인력의 교육과정을 마련하고, 해당 역할을 수행할 전문적인 전담 인력을 배정.

  3. 공개 플랫폼 구축: 구술채록 결과물을 아카이브화하여 '만화·웹툰 구술사 디지털도서관' 등을 구축하고, 메타데이터 기반 검색시스템 개발.

  4. 산업 연계 콘텐츠 제작: 구술채록 기반 웹툰·다큐·전시 연계 프로젝트를 공공·민간 협력으로 추진.

  5. 전문가·협회와의 협업: 한국만화웹툰학회를 중심으로 만화웹툰협회총연합 등과 협력하여 구술채록 대상자 추천 및 자료 공유 체계를 마련.


구술채록은 단지 과거를 기록하는 일이 아니라, 현재의 맥락을 미래로 이어주는 창작문화의 중추이다. 특히 만화와 웹툰처럼 개인 창작자의 경험이 집단기억보다 중요한 산업일수록, 그들의 목소리를 구조화하고 기록하는 일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창작 생태계의 일환이다. 구술채록의 기록관리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기록물의 안전한 보존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록관리는 단순한 보존을 넘어, 이용자가 필요할 때 손쉽게 접근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체계화된 관리체계를 구축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전통적인 이용 방식은 소장기관을 직접 방문하여 기록을 열람하는 것이며, 보다 발전된 형태는 온라인을 통한 디지털 서비스 제공이다. 이러한 두 가지 방식은 여전히 유효한 기본 틀을 이루지만, 정보 접근성과 다양성에 대한 수요가 높아진 현대 사회에서는 보다 다층적이고 창의적인 활용 방식이 요구된다. 이에 따라 기록관리 기관은 이용자 중심의 관점에서 유연하고 혁신적인 활용정책을 마련하고, 다양한 플랫폼과 연계된 서비스를 통해 구술기록의 실질적 가치가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구술기록의 효과적인 관리와 활용을 위한 기반이 마련되어야 하며, 특히 기록관리 기관은 명확한 관리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이와 함께 구술기록관리전문가 또는 기록관리전문가의 전문 역량을 확보하고, 수집-정리-보존-공개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포괄하는 관리규정을 체계적으로 정비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구술채록이 단지 수집된 기록에 머무르지 않고, 실질적인 사회문화적 자산으로서 지속 가능한 활용이 가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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